바람의 나라 - 유리명제와 대무신제

요즘 고구려 역사 때문에 열 좀 받은 김에 하나 올리고자 합니다.
'바람의 나라'는고구려를 배경으로 한 역사 판타지물입니다.
정치와 인간들의 오해, 사리사욕... 거기에 더불어 신수(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와 천녀, 그리고 죽은 자가 공존하여 돌아가는 세계...
하지만 그 안에 존재하는인물들의 느끼는 감정과 고민이 현재의 우리들과 별반 다르지 않기에 볼수록 공감이 가는 공간입니다.
간혹 생각해봅니다.
곰이 변한 여인과 하늘의 신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
알에서 태어났다는 주몽,
상상으로만 그렸다고 하기에는 자세히 묘사되어있는 청룡,
그리고 섬세한 조각으로 살아있는 듯한 해태...
아득히 먼 우리의 땅에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던 이 모든 것이 실제로 공존하며 살아가고있지는 않았을까...
설화는 정말 거짓된 이야기인가... 아니면 우리가 믿지 못하는 또 하나의 진실인가...
(본 작품은 1992년 02월 18일에 연재를 시작하였으나 험난한 한국 순정만화의 현실 때문에 몇 번이나 휴재를 맞은 고난의 작품입니다. 그러한 사항이 마치 우리네 역사와도 같아 더욱 눈물이 나네요.
계속 작품을 만들어주고 계신 김진 작가에게 감사를...)
에..또... 근데 작품을 불펌을 하게 되어서 죄송하네요. ^^;;;

◆ 유리명제(榴璃明帝) - 유류(孺留)
서기18년(유리명제37년)4월 비 오는 날 어린 여진황자가 강신(江神)을 따라 실종된 바로 그 날부터...
도절태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해명태자 역시 민심을 얻고 있음에 불안한 나머지, 아들에게 자살을 명령하였던 잔인한 왕 유리명제, 범인인 그 자신과는 달리 신수를 거느린 아들 무휼과 신기를 지닌 딸 세류를 두려워하였으며, 아비없이 부여에서 자라야했던 어린 시절의 아픔을 극복하지 못했던 그는 어쩌면 아주 외로운 사람이였는지도...
(하지만 난 그가 싫다... ==;;)
... 내가 아버지를 찾아
이 땅에 왔을 때, 아버지는
새 아내와 살고 있었다.
내가 후레자식 소리를 들으며
살고 있는 동안
내 자리에서 곱게 자란
그녀의 아들들과...
그럼에도, 내 아버지 주몽이
나를 태자로 삼아주겠다
약속하자, 그 여자와 아들들은
이곳을 떠나 대적할 나라를 세웠다.
아버지의 신하들은
내가 왕이어도
왕을 가르치려 들었고,
나는 늘...
아비없이 자란 후레자식
유리일 뿐이었다.
난, 늘, 어린 시절의
그 유리로 되돌아가지 않기 위해
내가 왕이라는 걸
끊임없이 깨닫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모두에게
내가 왕이라는 걸 끊임없이
가르쳐 주어야만 했다.
- 본문 중에서
◆ 대무신제(大武神帝) - 무휼(無恤)

어린 나이에도 부여를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주몽의 후손.
하지만 그가 정녕 강했던 걸까?
나라를 위해, 아버지를 위해, 백성을 위해,
어린시절부터 너무 커서 헐떡이는 투구를 눌러쓰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워야했던 그는...
차비 연에게만 상처를 치유 받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연이는 너무나 일찍 무휼을 외톨이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왕이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과 형제들과, 가장 소중한 아들조차도 감싸 보호할 수 없는 왕이란 임무 속에서, 묵묵히 상처를 숨겨야만 하는 그...
무휼은 왕이 된 후에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 되어버립니다.


작가가 말하는 무휼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신라 1000년의 영광을 위해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축소, 왜곡했다고 신채호 선생님은 말씀하시고 있다. 그 왜곡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대무신왕'편인데, 그의 기록이 몹시 축소되었다는 것은 역사를 잘 모르는 나조차도 느낄 정도이다.
일단 나이대가 형편없이 맞지 않고, 삼국유사와 사기 서로 다른 부분까지 있는 것이다. 또한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대왕이나 신왕이라는 건, 어지간한 왕의 앞에 붙는 찬사도 아닐진대, 대무신왕이라 이름 붙여질 정도이 왕에 대한 기록이 이 정도일 리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고, 사실 신채호 선생님이 말한 '한'과의 9년 간의 전쟁을 한 장본인이 바로 그였다는 것이 이 작품의 기본 요지이다.
호동과 낙랑의 관계는 사실 그의 인생의 한부분일 뿐이고 그의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나는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인간이나 사람에 대한 어떤 계산된 속성을 표현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나의 주제는 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일생을 지배하게 될 필연적인 양심과 진실의 눈물에 있다. 화려한 치장,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세는 긴 인생 중에 한번 입어보는 의상에 불과할 뿐 생의 전부는 아니다.
내 생각으로는 인생을 살아가는 어떤 목표란 늘 어떤 종류의 사람이었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에도... 그러므로 나는 그가 늘 울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의 눈물은 역사에도 쓰여 있다. 난 아버지로서 결국은 자기 아버지와 똑같은 길을 걸었던 그를, 그가 흘렸던 눈물과 함께 몹시도 오래 생각했었다.
그는 강하고 매력적이었지만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그의 의지는 그를 늘 불행하게 했었고, 그의 대왕과 신왕이라는 찬양의 이름 뒤에는 서글픔이 인지되었다. 그래서 난 그를 왕이어서 불행한 자로 사랑한다.
우리 역사의 잊혀진 부분, 신화의 시대에 존재하였던 가장 뜨거우면서도 가장 냉정했던 왕...
그리고 그럼으로써 내가 몹시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사람, 그가 무휼이다.
<1993년 6월 김진>
역사속의 유리명제(榴璃明帝)
주몽이 북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서 황후 연씨(소서노)와 결혼을 하여 고구려를 세우고 동명성제(東明聖帝)가 되었지만, 그의 부인(황후 예씨)은 주몽의 어머니, 유화와 함께 동부여에 남아 유류(孺留)[또는 유리(榴璃)]를 낳았습니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 손가락질 받던 소년 유류가 아버지에 관해 묻자 예씨는 "네 아버지는 비상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라에서는 아버지의 비상함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남쪽 지방으로 도피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셨다. 네 아버지가 떠나실 때 내게 '당신이 만약 아들을 낳으면, 나의 유물이 칠각형의 돌 위에 있는 소나무 밑에 숨겨져 있다고 말하시오. 만일 이것을 발견하면 곧 나의 아들일 것이오.' 하고 말씀하셨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류는 그날부터 산을 헤매며 주몽의 유물을 찾았으나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유물을 찾아 헤매다가 지친 몸으로 돌아와 마루에 털썩 앉는 순간 유류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바위틈에 끼인 금속성의 물건이 내는 소리 같은 것이었습니다. 몇 번 같은 동작을 반복한 끝에 그 소리의 진원지가 기둥과 주춧돌 사이임을 발견한 유류는 그것을 면밀히 살펴보게 되었고, 그것이 칠각형임을 알아내자 불현듯 아버지 주몽이 남긴 말이 떠올라 기둥 밑은 조사하였더니, 과연 그곳에 아버지가 남긴 징표인 부러진 칼 조각이 있었습니다. 주몽은 자신의 칼을 동강내어 그 한쪽을 징표로 남겨 두었던 것입니다.
유류가 간신히 증표를 찾았을 무렵은 할머니 유화도 이미 죽고 없었고 , 예씨 모자를 보살펴주던 금와왕도 임종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금와의 맏아들 대소가 동부여의 실질적인 왕으로 군림하던 시기였습니다.
주몽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대소의 군림은 곧 예씨 모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었기에 유류는 서기전 19년 4월 어머니 예씨와 탈출에 성공하여 고구려 땅을 밟게 되고 아버지 주몽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당시 중병에 걸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던 주몽은 아내와 아들이 찾아 들자 매우 기뻐하였고, 유류를 태자에 봉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 조정은 두 파로 나뉘게 됩니다. 유류의 태자 책봉에 찬성한 유류파와 반대한 소서노의 아들들인 비류와 온조를 지지하고 있던 비류파로, 결국 유류파의 승리로 유류는 태자에 책봉되었고, 비류파는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소서노와 그녀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비롯하여 10명의 신하는 남쪽으로 떠나 백제를 세우게 됩니다.
이때 졸본의 많은 백성들이 그들을 따라나섰고, 이 때문에 민심이 이반되어 유류는 즉위 후에도 백성들의 호응을 얻지 못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고, 급기야는 도성을 옮기기에 이릅니다.
비류파들이 떠난 뒤, 유류는 동명성제 측근들의 보필을 받으며 지냈으며 서기전 19년 9월 동명성제가 생을 마감함에 따라 고구려 제 2대 황제에 오릅니다. 그가 바로 유리명제입니다.
(부인이 4명(자녀 6남1녀)이나 되었으며, 그 부인들 싸움사이에 끼어 그 유명한 황조가를 불렀던 인물이지도 합니다.)
유리명제는 즉위 이듬해 다물후 송양의 딸을 황후로 맞아들여 지지기반을 닦습니다. 이는 개국공신들과 유리명제 간의 치열한 정권 다툼으로, 자기 세력이 없던 유리명제는 이와 같이 여러 개국공신들과의 혼인관계를 맺어 지지기반을 확대하였습니다.
이러한 온건적인 태도는 서기전 9년 선비족 토벌전쟁을 계기로 좀더 공격적으로 변합니다. 잦은 선비족의 약탈에 백성들의 불안감이 짙어지자 부분노를 선봉장으로 하여 직접 선비족을 응징하여 군주로써의 위엄을 갖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무렵은 고구려와 동부여 사이에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이는 대소가 동부여의 왕이 되면서 고구려에 대한 침략전쟁을 감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랜 소모전으로 내부적인 어려움을 겪던 대소는 유리명제 14년에 화친을 제의하고 인질 교환을 요청합니다.
이에 유리명제는 화친을 받아들여 태자인 맏아들 도절을 보내려 하였으나 부여에 대해 강경론을 고수하는 신하가 많아 이 화친조약을 지켜지지 않았으며, 계속되는 반목 속에 유리명제는 태자 도절을 죽게 만들고야 맙니다.
(도절의 죽음 유리명제에 명에 의한 타살 이였는지, 스스로 자살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태자의 죽음으로 졸본성 백성의 민심이 떠나게 되자, 유리명제는 졸본성에서 위나암성으로 도읍을 옮겨, 부여의 위협에서 벗어나면서 정권장악의 기틀을 마련하고, 후에 한나라로부터 고구려현을 정복하여 한의 동방정책 자체를 무력화시켰습니다.
하지만 천도 후 유리명제는 자신에게 도전하는 그 어떤 세력이라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 예로 둘째 아들 해명은 천도 1년 후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해명태자는 그대로 졸본에 남아 민심을 안정시키고 있었습니다. 이는 일종의 분조(分朝 : 특별한 상황에서 임금의 역할을 분리하는 것)형태로 졸본에도 많은 수의 신하들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해명은 힘이 세고 용맹이 넘치는 인물로, 그에 대한 소문을 들은 황룡국왕이 해명을 시험하고자 활을 하나 선물로 보내고 해명은 황룡국 사신이 보는 앞에서 그 활을 힘껏 당겨 꺾어 버립니다.
마침 당시 유리명제는 자기에게 등을 돌린 졸본의 민심을 휘어잡고 있는 해명이 반란을 도모할까봐 무척 두려워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유리명제는 마침 해명이 황룡국왕과의 외교문제를 일으키자 황룡국에 밀서를 내려 "해명이 자식으로서 효성이 없으니, 나를 위하여 그놈을 죽여주시오" 라고 부탁을 하게 됩니다.
(황룡국은 당시 고구려에 비해 아주 약소한 국가였다고 합니다.)
두 달 후 황룡국에서 사신이 와서 해명태자를 초청하고, 초정에 응하는 것을 강하게 만류하는 신하들에게 "하늘이 나를 죽이려하지 않는다면 황룡왕 따위가 감히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란 말을 하며 해명은 황룡국으로 떠납니다. 허나 어찌된 사유인지 황룡왕은 그를 죽이려는 것을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듬해 3월 유리명제는 결국 자신이 직접 해명에게 자결을 명하게 됩니다.
"내가 도읍을 옮긴 것은 백성들을 안정시켜 국가의 위업을 다지려는 것인데, 네가 나를 따르지 않고 힘이 센 것을 믿고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이것이 자식 된 도리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제 내게 칼을 내리노니 죄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자결하도록 하라."
이에 해명을 "지난번에 황룡왕이 강한 활을 보냈기에, 나는 그들이 우리를 업신여길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활을 잡아당겨 꺾음으로써 답한 것인데 뜻밖에 마마께 견책을 당하게 되었소. 아바마마께서 불효의 명목으로 내게 칼을 내려 자결을 명하셨으니, 어떻게 그 명령을 거역할 수 있겠소?" 라며 만류하는 신하를 뿌리치고, 여진의 동원 벌판으로 가서 땅에 창을 꽂아놓고, 말을 타고 힘껏 달려 그 창에 몸을 날려 자결하였으며, 이 때 그의 나이 21세였습니다.
유리명제는 그를 태자의 예로 동원에 장사토록 하고, 그곳에 사당을 세웠습니다.
또한 유리명제의 넷째아들 여진은 서기 18년 4월에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이에 유리명제는 슬퍼하며 사람들을 풀어 시체를 찾게 하였으나 , 시체는 한동안 발견되지 않다가, 수일이 지나서야 비류수 사람 제수에 의해서 발견되었습니다. 여진이 죽음에 충격을 받은 유리명제는 병상에 드러누웠고, 그해 10월에 사망합니다.
역사속의 대무신제(大武神帝)
유리명제의 셋째 아들로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매우 총명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6살 어린 나이에 섬김을 요구하는 부여사신에게 유리명제가 화신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직접 사신을 찾아가 "우리 선조는 신령의 자손으로 현명하고 재주가 많았다. 그런데 대왕이 질투하고 모해하여 부왕에게 참소하는 바람에 말이나 기르는 직위를 부여받아 어려움을 당했다. 이 때문에 불안을 느껴 탈출하였던 것이다. 이제 대왕이 전날의 잘못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군사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나라를 멸시하고 있으니 사신을 돌아가서 대왕에게 '이곳에 알을 쌓아놓았으니 만약 대왕이 그 알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신하와 장수의 례로 섬길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섬기지 못하겠다.'고 전하라."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부여 왕이 이 말을 듣고 그 뜻을 여럿에게 두루 묻자 한 노파가 그 뜻을 알아차려 "알을 쌓아놓은 자는 위태로울 것이요. 쌓아놓은 알을 무너뜨리지 않는 자는 안전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곧 왕이 자기의 위태로움은 알지 못하고 남이 와서 굴복하기를 강요하고 있으니, 이는 위기를 피하여 자기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무휼은 10세 되던 해에 고구려를 침략한 부여군을 산속 깊숙이 끌어들여 골짜기에 적을 가두고 기습전을 펼치는 계책을 내놓아 방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11세 되던 해에 태자에 책봉되어 유리명제를 대신하여 군사와 국정을 맡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15세의 어린 나이로 제위에 올라 과감한 팽창정책을 감행하게 됩니다. 그가 바로 대무신제입니다.
(대무신제 : 부인 2명 자녀 2남)
대무신제에게 서기 20년 (대무신제 3년) 10월 부여왕 대소는 몸통이 두개인데 머리는 하나 뿐인 붉은 까마귀를 고구려에 보내며 "까마귀는 검음 법인데, 이제 빛이 변하여 붉게 되었고, 또한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니, 이는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이다."라고 부여가 고구려를 합병하겠다는 암묵적인 선전포고를 합니다.
이에 대무신제(무휼)는 "검은색은 북방의 색인데, 이제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다. 또한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이다. 그런데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가지지 못하고 내게 보냈으니 양국의 존망은 알 길이 없구나." 라고 달리 해석하여 전하여 대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 대무신제는 부여 정벌을 준비하여 서기 21년 12월에 선제공격을 감행합니다.
이 전투에서 대무신제는 넓은 개펄을 발견하였는데, 그 주변은 강이 흐르고 곧잘 짙은 안개가 끼곤 하였습니다.
대무신제는 이를 이용하여 근처에 진을 치고 일부 병사들을 잘 들어나는 위치에서 쉬게 한 뒤, 나머지 병사들을 매복시킵니다. 이때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전한 대소는 고구려군이 휴식을 취하는 것을 보고 기습을 감행, 안개가 자욱하게 낀 개펄에 빠져 말이 허둥대게 되자, 고구려군이 때를 놓치지 않고 사방에서 돌진하였습니다. 이 돌격대의 선봉장이 괴유였는데 그는 부여 정벌의 소식을 듣고 자원한 장수로 키가 9척에다 힘은 장사였고, 무기를 다루는 솜씨도 대단하였다합니다. 그리고 그의 칼날은 부여왕 대소의 목을 벱니다. 이때가 서기 22년 2월 입니다.
왕을 잃은 부여군은 곧 대열을 정비하고, 고구려군을 압박, 수적우세를 앞세워 고구려군을 겹겹이 호위하였습니다. 하지만 쉽사리 공격을 하지 못하고 고구려군의 식량이 고갈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는 식량이 고갈되면 고구려군 스스로 포위망으로 뛰어들 것이라는 판단이었으며, 그 예상은 적중하였습니다. 고구려군은 포위당한 채 군량미가 고갈되었고, 결국 대무신제는 탈출로를 모색하게 되는데, 마침 뜻밖에도 짙은 안개가 끼어 7일간 한치 앞도 구분할 수 없게 되었으며, 대무신제는 그 안개를 이용하여 탈출에 성공합니다.
이때 고구려군은 이른바 '허수아비작전'을 썼는데, 허수아비를 만들어 마치 보초를 서고 있는 병사처럼 꾸며 부여군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한 뒤 사잇길을 이용하여 빠져나와 밤낮으로 행군하여 위나암성으로 겨우 돌아왔다고 합니다.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대무신제는 경솔하게 부여를 공격한 것을 후회하고, 전사자들의 집안을 직접 위로하고, 부상당한 병사들을 문병하였으며, 그의 이런 적극적인 수습책에 백성들의 원성은 누그러졌습니다.
한편 부여는 왕을 비롯한 1만 군사를 잃었으며, 그 여파로 왕족들 사이에 왕위 다툼이 벌어졌고, 이 때문에 대소의 막내동생은 무리를 이끌고 부여를 빠져나가 갈사국을 세우고, 대소의 사촌동생은 백성을 이끌고 고구려로 귀순합니다.
바로 이런 혼란으로 부여의 국력은 점차 약화되어, 마침내 고구려에게 북방의 맹주 자리를 내주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대무신제는 안으로 관제를 정비하는 한편 서기 26년 10월 직접 정벌전쟁에 나서 개마국왕을 죽이고 개마국을 복속시키고, 12월 구다국을 복속시켰습니다.
이렇듯 고구려의 팽창정책이 가속화 될 무렵, 유수는 한의 요동태자를 앞세워 고구려를 침략합니다. 서기 28년 7월 한의 100만 군사에 대해 위나암성에서 수성전(守城戰)에 돌입한 고구려 조정에서 당시 좌보로 있던 재상 을두지는 적군이 암벽성인 위나암성 안에 물이 고갈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연못에서 잉어를 잡아 수초에 싸서 적장에게 보냅니다. 그러자 적장은 성안에 물이 있으니 단시일 내에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물러납니다.
이른바 일두지의 '잉어계책'으로 위기를 모면한 대무신제는 그 이후로도 팽장정책을 지속하여 낙랑을 정복합니다.
낙랑 정복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람은 대무신제의 제2황후의 아들 호동입니다.
호동은 낙랑 정복을 위해 낙랑왕 최리의 달과 결혼하면서까지 철저하게 정복야욕을 숨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호동은 낙랑정복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 체 제1황후가 꾸민 계략에 걸려 황후를 간통했다는 누명을 쓰게 되고, 결국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자결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아래에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에 대무신제는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낙랑을 복속하게 됩니다.
하지만 낙랑의 복속은 동한의 반발에 부딪히게 됩니다. 동한은 낙랑이 원래 자신들의 땅이라 주장하며 돌려줄 것을 주장하였으나 고구려가 이에 응하지 않자 동한의 유수는 서기 44년 바다를 통해 낙랑지역에 병력을 투입하였고, 이에 밀린 고구려는 결국 낙랑을 동한에 뺏기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서기 44년 10월) 대무신제는 향년 4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대무신제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제1황후는 별다른 기록이 없으며, 제2황후 금씨는 부여의 왕족 갈사왕의 손녀입니다.
갈사왕은 금와의 여섯째아들로, 금씨가 대무신제의 두 번째 아내가 된 것은 정략적인 이유에서 였을 것입니다. 갈사부여를 개국한 갈사왕은 고구려의 배려 없이는 나라를 지탱할 수 없었고, 따라서 조공의 형태를 띠며 고구려 황실과 혼인 관계를 맺었을 것이기 때문 입니다.
금씨의 아들은 얼굴이 곱상하며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에 따라 이름도 호동(好童)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대무신왕 15년 4월, 호동이 옥저에서 유람하고 있었는데, 그때 낙랑왕 최리가 그곳을 다니다가 그를 만나 물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은 아니구려. 그대 북국 신왕의 아들이 아니오?"
낙랑왕 최리는 마침내 그를 데리고 돌아가서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 후 호동이 본국에 돌아와서 남몰래 아내에게 사자를 보내어 말했다.
"당신이 국가의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과 나팔을 부숴버릴 수 있다면, 나는 예를 갖춰 당신을 맞이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당신을 맞아들일 수가 없소이다."
예로부터 낙랑에는 적병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소리가 나는 북과 나팔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그녀로 하여금 이를 부숴버리도록 한 것이었다. 최리의 딸은 예리한 칼을 들고 남모르게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을 찢고 나팔을 베어버린 후, 이를 호동에게 알려주었다. 호동이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 최리는 북과 나팔이 울지 않아 방비를 하지 않았고, 우리 군사들이 소리 없이 성 밑까지 이르게 된 이후에야 북과 나팔이 모두 부서진 것을 알았다.
그는 마침내 자기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이 사건 이후 호동의 세력이 급성장하여, 조정 일부에서는 제2황후의 소생인 호동을 태자로 삼으려는 움직임도 있었던 듯 합니다.
그 때문에 제1황후는 그녀의 소생인 해우를 태자로 봉하지 않고 호동을 태자로 세울까봐 몹시 염려하였으며, 결국 계책을 하나 세우게 됩니다.
첫째 황후는 왕에게 참소하였습니다.
"호동이 나를 무례하게 대하며, 욕보이려 하였습니다."
왕이 대답하였다.
"황후는 호동이 다른 사람의 소생이라 미워하는 게요?"
첫째 황후는 대무신제가 자기를 믿지 않음을 알고, 장차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울면서 말했다.
"청컨대 대왕께서 살펴보소서. 만약 그런 일이 없으면, 제가 죄를 받겠습니다."
이렇게 되자 대왕은 호동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그에게 죄를 주려하였다. 이 사실을 안 어떤 이가 호동에게 말했다.
"그대는 왜 스스로 해명하지 않는가?"
호동이 대답하였다.
"내가 만일 해명한다면, 그것은 어머니의 죄악을 드러내는 것이며, 부왕에게는 근심을 더해주는 것이니, 이를 어찌 효라 할 수 있겠는가?"
호동은 곧 칼을 품고 엎드려 자결하였다.
(제 사견이지만, 신동이라 불리며 정치적 술수가 능한 대무신왕이 첫째황후의 간계를 정녕 모르지는 않았을 거라 봅니다. 분명 호동이 대무신왕의 의도를 오해하고 자결은 한거라 믿고 싶어요... ㅠㅠ)
첫째황후에 관련된 내용은 이처럼 호동의 기사에 한정되어 있을 뿐 성씨도 구체적인 기록도 없습니다. 그녀가 제5대 모본제(해우) 모후임에도 불구하고 언급이 없는 것은 아마도 모본제가 폭군인데다가 자신의 근신 두로에 의해 살해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참조자료 [신삼국사기 고구려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