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나라 - 무휼의 형제들
◆ 해명(解明)

아버지 유리명제의 명을 따라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어야했던 그는, 스스로 자기 왕을 동생 무휼로 정했습니다.
무휼을 위해 죽어서도 이승을 떠돌며 신수와 대적하고, 자기 군사에게 그를 따르도록 하는 등 큰 도움을 주지요.
백제의 현무를 막아 자기 목숨을 구해준 것이, 이미 죽은 자기의 삼촌 해명임을 호동이 알아차릴 날이 올련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해명은그런 것은 생각하고 있지 않는 듯 합니다. 다만 자기 왕을 위할 뿐...
그의 인생은 너무 외로와서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만일 해명이 왕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난 죽어
그 별에 덧 씌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와 함께
나의 나머지 시간을 살아나갈 것이다.
그를 도와 주겠느냐?
그는 바른 왕이 될 것이다.
◆ 세류

어릴 때부터 신기가 있어 새를 다룰 수 있고, 주작을 부립니다. 단, 야맹증에 물에 약하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말을 타고 전장에 나가는 멋진 여장부!
거기 거기 세류에게 반하신 분~
세류공주는 이미 결혼을 했었어요. 어릴때 날개가 달린 우(羽)氏 남자와 혼약을 하고사별을 했지요.
항상 어린 무휼을위해 살려고 했었지요.
하지만 왕위에 오르고점점 차가워질수밖에 없는 무휼을 보며 갈등을 겪습니다.

까맣고 총명한 눈동자.
부친에게 버림받고 세상사가 두려웠던 그 시절에
내게, 겁내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해주었던
조그만 형제.
그래.
궁의 그 싸늘한 한기를 감당할 수 없으면서도
세류가 돌아왔던 건 오직 너 때문이었다.
커다란 투구가 머리 위에서 흘러내리던
조금은 어리고
조금은 다정했던 너.
네 보송한 얼굴.
그 까만 눈동자가 날이 갈수록
어두워져 가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내가 받아야 할 아비의 미움보다
네가 감당해야할 힘겨움이 더욱 더 안스러워서.
돌아와야 할 곳, 그곳에 있는 너를.
그 한기가 온몸에 느껴진다.
내가 사랑했던 작은 동생.
내가 지켜주고팠고 내가 대견해했던 너는
대체 어디로 간 거냐?
거기에 앉아 그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대체 누구냐?
작가가 말하는 세류
세류는 무휼의 누나이다. 어려서 부터 새들과 교류했고 주작을 신조로 갖고 있다.
그러나, 무휼이 자신의 친구로 청룡을 갖고있으며 그 청룡이 하나의 객체로 존재하는데 반해 세류는 그네 자신의 속에 주작을 품고있으며 그것은 결코 자신과 동떨어진 다른 객체가 아니다.
또한, 그것은 그녀의 어린 시절을 스쳐 지나간 어떤 감정의 유산이기도 하며 그녀가 사랑 자체에 경직성을 보이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한다.
그래서 그녀의 사랑은 계속 미진하며 두려움을 내포하고 있다.
그녀는 어떠한 동기로 말미암아, 이별이나 죽음 자체에 공포를 갖고 있으며, 그 때문에 무력하고 소극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가 인간적으로 약하다거나 왜소한 심령의 소유자라는 뜻은 아니다.
나의 세류는 충분히 강하지만 그만큼 충분히 섬세하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녀가 여성적인 면을 잃어버린 치우쳐진 기형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녀는 사랑할 것이고, 오래 그 사랑을 기억 할 것이다.
그녀의 사랑에는 배신이 없기 때문이다.
<1994년 7월 김 진>
◆ 민중원제-해색주(解色朱)

무휼의 이복동생으로 책을 읽는 것을 즐깁니다.
무휼에게 정치적인 면에서 간언도 많이 하고 송사를 같이 논하는 상대입니다.
반면 앞으로 나아가는데 굽힘이 없고 적을 많이 만드는무휼과 신념과 사상의 갈등도 많이 겪고 다툼도 잦습니다.
더우기 아버지 유리명제와 같은 길을 걷는 듯한 무휼을 보며, 해색주 본인도 상처를 깊이 받기도 하지요.
호동에게는 참으로 좋은 삼촌입니다.
하지만 무휼이 자신의 깊은 속내를 들어내었을때...
그때 그는눈물 흘릴 수 밖에 없었던 아우입니다.
(차라리 그때 치고 박고 싸워주지.. ㅜ- 훌쩍)
형님은 하늘을 보고 저는 땅을 본다고
그래서 우리 형제의 길도 생각도 그리 틀린거라고...
형님은 하늘길을 저는 땅의 길을 가는 거죠.
우리 인생이 조금만 더 길고...
우리의 청춘이 조그만 더 천천히 간다면
나는, 좀더 많이 당신과 이야기 나누고
좀더 당신을 이해해볼 수 있었을 텐데.
당신의 꿈과 내 꿈을 함께 일궈
좀더 나은 세상을 일궈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형님도 저도...
너무 한순간에 어른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 시간은 이리도 빠른가 봅니다...
- 본문 중에서
◆ 재사(再思)
무휼의 이복동생이자 해색주의 동생으로 어릴 때부터 궁에서 멀리 떨어져 살았습니다.
덕분에 총명하기는 하지만, 아무도 속내를 들어내지 않는 궁안에서 이용당하기도 쉬운 인물이고, 순박하기는 하지만 야심도 가득한 인물입니다.
(^^;;; 사실 지금 재사에 대해선 기억이 좀 가물가물하네요.. 책을 다시 보고다시 쓸께요. 에구 창피해~)
◆ 여진(如津)

많이 여리고 많이 울고...
아버지가 무서워서결국 견디지 못하고 변을 당합니다.
무휼은 끝내 지켜주지 못했던 어린 동생을 늘 가슴 속에 품고 삽니다. 여진이 죽던날은 바로 호동이 태어난 날입니다.
이 만화에서 시작과 동시에 죽어버린 아주 비극적인 인물...
(이미 죽어서 죽은 자로 등장하는 해명두 있군요...)
그러구보니 무휼 형제 중 돌연변이처럼 여리군요.. 00a
역사속의 도절(都切) (서기전 17년~서기 원년)
유리명제의 첫째 아들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전 6년 부여왕 대소가 화친조약을 체결하고 인질을 교환하자고 제의하였다. 이때 도절은 이미 태자에 책봉되어 있었고 나이 12세였다. 유리명제는 당시 부여를 겁내고 있었고 전쟁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 화친제의를 승낙한다.
하지만 도절은 부여로 떠나면 십중팔구 죽을 것이라 판단하였으며, 부여에 대해 강경론을 고수하는 신하들이 많아 이 화친조약은 무산된다.
이로 인해 부여는 그해 11월 군사를 보냈으나 폭설로 인해 퇴각한다.
부여에 대해 강경론을 내세워 번번히 화친을 반대하는 대표자는 탁리와 사비였는데 유리명제는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교시사건'을 일으킨다. 교제에 쓸 돼지를 놓아주고 그들로 하여금 잡아오게 하였는데 그들이 그 돼지를 잡아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게 다리의 힘줄을 잘라 가지고 오자 신성한 제물에 상처를 입혔다는 죄목으로 그들을 죽여버린것이다.
이리하여 강경론자들을 누른 유리명제는 다시금 부여와 화친을 서두르지만 이번에는 이미 성장한 18세의 도절이 강경한 자세로 제동을 건다. 이런 아버지 유리명제와 태자 도절간의 대립으로 인해 도절은 서기 원년 1월에 죽음을 택하게 된다.
역사속의 해명(解明) (서기전 12년~서기 9년)
유리명제의 둘째 아들이며, 제2황후 송씨의 소생으로 16세의 나이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그의 태자 책봉 1년전에 졸본성에서 위나암성으로 천도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해명은 그대로 졸본에 남아 있었다. 일종의 분조(分朝 : 특별한 상황에서 임금의 역활을 분리하는 것)형태로 졸본에도 많은 수의 신하들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해명은 힘이 세고 용맹이 넘치는 인물로, 그에 대한 소문을 들은 황룡국왕이 해명을 시험하고자 활을 하나 선물로 보내고 해명은 황룡국 사신이 보는 앞에서 그 활을 힘껏 당겨 꺾어 버립니다.
마침 당시 유리명제는 자기에게 등을 돌린 졸본의 민심을 휘어잡고 있는 해명이 반란을 도모할까봐 무척 두려워하고 있었다고 한다.
유리명제는 해명이 황룡국왕과의 외교문제를 일으키자 황룡국에 밀서를 내려 "해명이 자식으로서 효성이 없으니, 나를 위하여 그놈을 죽여주시오" 라고 부탁을 하게 된다.
(황룡국은 당시 고구려에 비해 아주 약소학 국가였다고 한다.)
두달 후 황룡국에서 사신이 와서 해명태자를 초청하고, 초정에 응하는 것을 강하게 만류하는 신하들에게 "하늘이 나를 죽이려하지 않는다면 황룡왕 따위가 감히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란 말을 하며 해명은 황룡국으로 떠납니다. 허나 어찌된 사유인지 황룡왕은 그를 죽이려는 것을 실행하지 못했다.
그 이듬해 3월 유리명제는 결국 자신이 직접 해명에게 자살을 명하게 된다.
"내가 도읍을 옮긴 것은 백성들을 안정시켜 국가의 위업을 다지려는 것인데, 네가 나를 따르지 않고 힘이 센 것을 믿고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이것이 자식 된 도리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제 내게 칼을 내리노니 죄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자결하도록 하라."
이에 해명을 "지난 번에 황룡왕이 강한 활을 보냈기에, 나는 그들이 우리를 업신여길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활을 잡아당겨 꺾음으로써 답한 것인데 뜻밖에 마마께 견책을 당하게 되었소. 아바마마께서 불효의 명목으로 내게 칼을 내려 자결을 명하셨으니, 어떻게 그 명령을 거역할 수 있겠소?" 라며 만류하는 신하를 뿌리쳤다.
해명은 여진의 동원 벌판으로 가서 땅에 창을 꽂아놓고, 말을 타고 힘껏 달려 그 창에 몸을 날려 자결하였으며 그의 나이 21세였다.
유리명제는 그를 태자의 예로 동원에 장사토록 하고, 그곳에 사당을 세웠다. 그리고 해명이 창에 찔려 죽은 그곳을 창원(槍原)이라고 하였다.
민중원제-해색주(解色朱)(?~서기 48년)
유리명제의 넷째 아들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대무신왕의 아우이며, 대무신와이 죽었을 때 태자가 아직 나이 어려 정사를 담당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백성들이 해색주를 왕으로 세웠다."고 한다.
아마도 대신들이 그를 황제로 추대한 것을 보아 그가 대무신제의 동복아우일 것으로 보인다.
민중원제는 제위에 오른 그해 11월에 많은 죄수들을 사면하고, 이듬해 3월에는 신하들에게 큰 연회를 베풂으로써 새로운 황제의 즉위를 알렸다.
그리고 서기 45년 5월 동부지역에 큰 홍수가 나자 국고를 열어 벡성들을 구제한다. 그러나 이듬해 겨울에는 위나암에 눈이 전혀 내리지않아 백성들은 겨울가뭄에 시달리게 된다. 이같은 국가적 어려움은 민중원제를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서기 47년에 병으로 드러눕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해 10월 잠우락부의 대가 대승 등 1만여 호가 낙랑으로 가서 한나라로 투항해버렸다.
이렇듯 국가 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서기 48년 병이 악화되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민중원제는 생전에 사냥을 하다가 민중원에 있는 석굴에 묻어줄 것을 유언한 적이 있었다. 이에 따라 신하들은 그를 민중원의 석굴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후와 신하들이 왕이 유언을 어기기 어려워 석굴에 장사했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그에게는 황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그 외의 가족에 관한 기록은 전무하다.
역사속의 여진(如津)(?~서기 18년)
유리명제의 넷째 아들로, 서기 18년 4월에 물에 빠져 죽었다. 이에 유리명제는 슬퍼하며 사람들을 풀어 시체를 찾게 하였으나 , 시체는 한동안 발견되지 않다가, 수일이 지나서야 비류수 사람 제수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여진이 죽음에 충격을 받은 유리명제는 병상에 드러누웠고, 그해 10월에 사망한다.
역사속의 재사(再思)
유리명제의 여섯째 아들로 제6대조 태조의 아버지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없다.
참조자료 [신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역사속의 유리명제의 딸
○ 二十四年, 秋九月, 王田于<箕山>之野, 得異人, 兩腋有羽. 登之朝賜姓<羽>氏, 尙王女.
24년 가을 9월, 왕이 기산의 들에서 사냥하다가 비상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양쪽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었다. 그를 조정에 등용하여 우(羽)씨 성을 주고, 왕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중에서...
유리명제의 가계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