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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에 카네쓰구 (直江兼続)

시이라 2010. 2. 12. 17:16

나오에 카네쓰구 (直江兼続)

에이로쿠(永禄)3년 ~ 겐나 (元和) 5년12월19일
 (1560~1619.1.23)

이름 변화 : 아명 (幼名) : 与六または與六
        -> 원복 (元服) 후 : 히구치 요로쿠 (樋口兼続)
        -> 데릴사위(婿入り) : 나오에 카네쓰구 (直江兼続)
        -> 에도막부 후 (江戸開幕後改名) : 시게미쓰(重光)
별칭 : 나오에 야마시로노카미 (直江山城守)
         (통칭 나오에 성주 (直江城州))
계명 (戒名) : 달삼전지거사 (達三全智居士), 
             영비원전달삼전지거사 (英貔院殿達三全智居士)

3개의 거북이등껍질 속에 3개 잎사귀「三つ盛亀甲に三つ葉」
- 나오에 카네쓰구 가 사용한 가문 문장 중 1개입니다.


묘소 (墓所) : 야마가타현 요네자와시 마츠가사키 신사 (山形県米沢市の松岬神社),
                  리센사 (林泉寺). 
                  교토부 교토시 우쿄구 묘신사 (京都府京都市右京区の妙心寺(みょうしんじ))
주군(主君) : 우에스기 카게카쓰(上杉景勝)
영지(藩) : 데와 요네자와번 가노 (出羽米沢藩家老)
친부(父) : 히구치 카네토요(樋口兼豊)
친모(母) : 이즈미 시게토시 (泉重歳女) 의 딸 (혹은 直江親綱의 딸이라고 도 함)
양부(養父) : 나오에 카게쓰나 (直江景綱)
형제 : 오오쿠니 사네요리(大国実頼), 히구치 히데카네(樋口秀兼), 
         키타(秀) -> 스다 미쓰타네(須田満胤) 의 처
정실(正室) : 오센노카타(お船の方) : 나오에 카게쓰나(直江景綱)의 딸
아들 : 나오에 카게아키(直江景明)
딸 : (於松) -> 혼다 마사시게(本多政重)의 정실, 스다 미쓰요시(須田光義)의 정실
양자(養子) : 혼죠 나가후사(本庄長房), 혼다 마사시게(本多政重), 阿虎


나오에 카네쓰구(直江兼続)는 일본 전국시대(戦国時代)부터 에도시대(江戸時代) 전기의 무장으로, 우에스기(上杉)氏의 가노(家老) 입니다.

부친은 나가오 마사카게(長尾政景) 밑에 종사한 히구치 카네토요(樋口兼豊)라고 하며 (키소 요시나카(木曾義仲)의 중신(重臣)인 히구치 카네미쓰(樋口兼光)의 후예라고도 전해집니다.)
아버지 히구치 카네토요(樋口兼豊)의 신분에 대해서도 견해가 나뉘어져 있습니다.
요네자와번(米沢藩)의 기록서『고대사적(古代士籍)』『우에다사적(上田士籍)』에서는  나가오 마사카게(長尾政景) 가노(家老), 우에다 집사(上田執事)라는 기록도 있는 반면, 『번한보(藩翰譜 : はんかんふ)』에 의하면  카네토요(兼豊)는 땔감관리(薪炭吏)였다고 합니다.

켄신(謙信) 시대
통설에서는, 카네쓰구(兼続)는 에이로쿠(永祿) 3년(1560)에 히구치 카네토요(樋口兼豊)의 장남으로서, 에치고(越後)의 사카토(坂戶) 성밖(城下) - (현재의 니가타현(新潟縣) 미나미우오누마시(南魚沼市 : みなみうおぬまし) -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에이로쿠 7년(1564)에 우에다 나가오(上田長尾)가문의 당주인 나가오 마사카게(長尾政景)가 타계하여, 우에스기 테라토라(上杉輝虎 = 후의 이름은 우에스기 켄신)의 양자가 된 우에스기 카게카쓰(上杉景勝)(당시의 이름은 나가오 아키카게(長尾顕景)를 따라서 카스가 산성(春日山城)에 들어와, 그대로 카게카쓰의 시동(小姓) · 시종(近習)로써 곁에서 모셨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입증하는 신빙성이 있는 사료는 지극히 적습니다.

속설에는 카네쓰구(兼続)가 재기와 미모로 켄신(謙信)의 눈에 띄어 총애가 깊은 중도(衆道)의 상대였음과 동시에 신뢰가 깊은 가까운 신하(近臣)이었다는 이야기도 많이 퍼져있지만, 이 또한 생전의 켄신과 카네쓰구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신빙성 있는 사료는 일체 확인되어 지지 않았습니다.

나오에 가(直江家) 상속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 급사(急死) 후, 덴쇼(天正) 6년(1578) 미타테의 난 (御館の乱)에서는, 부친  ·카네토요(兼豊)와 함께 우에스기 카게카쓰(上杉景勝)편에 붙었으며, 덴쇼 8년(1580) 8월부터, 카게카쓰의 중개인(取次役) 등의 측근으로써 일했다는 자료가 확인됩니다.
8월 15일(1580.9.23)에는 카게카쓰인판장(景勝印判状) 전달자(奏者 : そうしゃ)로 일했다고 합니다.
인판장(印判状 : いんぱんじょう)이란, 일본 고문서 사료 중 하나로, 주로 전국시대 이후의 인판(印判/印章)을 사용한 무가문서(武家文書)를 가리킨다.

덴쇼 9년(1581년)에, 카게카쓰(景勝) 측근인 나오에 노부쓰나(直江信綱)와 야마자키 슌센(山崎秀仙)이, 모리 히데히로(毛利秀広)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나오에 노부쓰나 사후, 카게카쓰(景勝)의 명령에 따라, 카네쓰구(兼続)는  나오에 카게쓰나(直江景綱)의 딸이자 나오에 노부쓰나의 아내이였던 오센(お船の方 : おせんのかた)의 서양자(婿養子)가 됩니다.
즉, 오센의 재혼 상대가 되어, 후계자가 없는 나오에가(直江家)를 이어서 에치고(越後) 요이타성주(与板城主) 성주가 된 것입니다.

이후, 우에스기가(上杉家)는 카네쓰구(兼続)와 카노 히데하루(狩野秀治) 2명의 집정체제에 들어갑니다.

토요토미(豊臣) 정권 시대
덴쇼(天正) 11년(1583)에는 카네쓰구(兼続)는 야마시로 모리(山城)가 됩니다.
덴쇼 12년(1584)말에서 히데하루(秀治)가 병에 쓰러지자, 카네쓰구(兼続)는 내정·외교의 중개 대부분을 맡게 됩니다.
히데하루(秀治) 사후에는 단독집정을 행하고, 이것은 카네쓰구(兼続)타계까지 계속되게 됩니다.

당시의 우에스기(上杉) 가신들은 카게카쓰(景勝)을 「주군(御屋形 : おやかたさま)」, 카네쓰구(兼続)를 「주인(旦那 : だんな)」라고 경칭, 이두정치(二頭政治)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덴쇼 14년 6월 22일 (1586.8.7),  경(교토)에 들어가는 것이 한참일 때에 주군·카게카쓰(景勝)은 종4위하(従四位下) ・좌근위권소장(左近衛権少将)으로 승급 전임, 카네쓰구(兼続)도 종5위하(従五位下)가 됩니다.

'시바타 시게이에 가(新発田重家)의 난'에서는 중요한 전략지 니이가타(新潟)를 둘러싸고 공방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덴쇼(天正) 11년(1583), 당시 니이가타(新潟)는 습지대이었기 때문에 호우에 의해 우에스기(上杉)세력이  패배합니다.
카네쓰구(兼続)는 이 대책으로서, 강언저리로 정하지 않고 본류와 지류가 그물코와 같이 흐르고 있었던 당시의 시나노강(信濃川)의 지류 나카노쿠치강(中ノ口川)강을 개착(開鑿)하는 등, 현재의 니이가타 평야(新潟平野)의 기초를 만들어, 착착 시바타 세력을 궁지에 몰아넣고, 덴쇼 13년11월20일 (1586.1. 9),  니이가타성(新潟城)과  누타리성(沼垂城)으로 부터 시바타(新發田)쪽을 구축(駆逐)했습니다.
이로 의해 니이가타 항(新潟港) 수리권(水利権)을 잃어버린 시바타 시게이에(発田重家)는 급속히 약체화됩니다.
덴쇼 15년10월13일 (1587. 11. 13),  카네쓰구(兼続)는 후지타 노부요시(藤田信吉)들과 함께 시바타성(新発田城)의 지성(支城)인 이지미노성(五十公野城)을 함락시키고, 머지않아 시바타성도 낙성(陥落), 난을 수습시켰습니다.

덴쇼(天正) 16년 8월 17일 (1588.10.7)에는 관백 태정대신(関白太政大臣)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서 토요토미(豊臣)라는 성(姓)을 받아, 토요토미 카네쓰구(豊臣兼続) 라는 이름으로 다시 야마시로노카미 (山城守)의 쿠젠안(口宣案)을 하사받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로부터 야마시로노카미(山城守) · 야마가타(山形) 30만섬의 증여 등의 스카웃 제의를 몇번이나 거절하는 등 주군 카게카쓰(景勝)에게로의 충의가 두터운 명장으로서 알려졌으며, 히데요시(秀吉)는 「나오에 카네쓰구 (直江兼続)은 천하의 처분을 맡길 수 있는 남자든지(直江兼続は天下の仕置きを任せられる男なり)」라고 평하였다고 합니다.

덴쇼(天正) 17년 (1589)에는 사도(佐渡) 정벌에 카게카쓰(景勝)와 함께 종군(従軍). 그 공(功)에 의해, 평정(平定) 후 사도(佐渡)를 지배할 것을 명받습니다.

덴쇼(天正) 18년 (1590)에 오다와라(小田原) 정벌에서도 카게카쓰(景勝)를 따르고, 마쓰야마 성(松山城)을 지키던 성주 대리, 야마다 나오야스(山田直安) 이하 카네코 이에모토(金子家基) · 난바타 노리쯔구(難波田憲次) ·  와카바야시(若林) 氏들을 물리치고, 선병(先兵)으로서 하치오지성(八王子城)을 공략시키는 등 해 간토의 여러성(関東諸城)을 공략. 분로쿠(文祿) 원년 (1592)부터의 조선 출병(임진왜란)에서도 카게카쓰(景勝)와 함께 참전하여 무공을 세웠습니다. (==+ 빠직!)

우에스기 령(上杉領)이 된 쇼나이(庄內) 지방에서도 다이호지성(大宝寺城)의 개수(改修)나, 봉기(一揆)의 제압등을 책임지고 관리하였다고 합니다.

안정된 토요토미(豊臣) 정권 중에서, 카네쓰구(兼続)는 전란(戦乱)으로 피폐해진 에치고(越後)를 재건하고자 분주히 움직입니다.
카네쓰구(兼続)는 농민에게 새로운 전답의 개간을 장려,  에치고(越後)의 평야부는 카네쓰구(兼続) 시대에 신전개발(新田開發)이 진행되어, 현재에 이르는 쌀 산지의 초석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산업을 육성하고, 상업의 발전에 노력했습니다.
그 근본가 된 것이 아오소(青苧)이라고 불리는 의류용 섬유로, 에치고(越後)에 자생하고 있던 모시풀(カラムシ)이라는 식물에서 만든 아오소(青苧)는, 목면이 보급되지 않고 있었던 당시, 의복 재료로서 귀중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이 아오소를 증산시켜, 짠 천을 교토에서 신속하게 팔고, 막대한 이익을 올렸습니다. 아오소의 시책은 에치고(越後)에 켄신(謙信)의 시대에 뒤지지 않는 번영을 초래했습니다.

덴쇼(天正) 23년(1595) 1월, 히데요시(秀吉)가 카게카쓰(景勝)에게 에치고(越後) · 사도(佐渡)의 킨산(金山) 지배를 맡기고, 수 있으면, 카네쓰구(兼続)는 그 대관(代官)이 됩니다.

케이쵸(慶長) 3년(1598), 히데요시(秀吉)의 명으로 카게카쓰(景勝)이 에치고(越後)로부터 아이즈(会津) 120만섬으로 증가 이봉(移封)되었을 때, 카네쓰구(兼続)에게는 우젠요네자와(出羽米沢)에 6만섬 (요리키(寄騎)를 포함하면  30만섬)의 영지가 주어집니다.
이 영지바꾸기(国替え)로, 우에스기령(上杉領)은 최상령(最上領)에 의해 아이즈(会津) · 오키타마(置賜)지방과 쇼나이(庄内) 지방으로 분단되었습니다. 카네쓰구(兼続)는, 이 분단된 영토의 연락로(連絡路)로서, 아사비 군도(朝日軍道)라고 불리는 연락로를 정비합니다.
그러나 이는 아사히 산지(朝日連峰) 의 산줄기를 종주하는 험한 산길로에서, 세키가하라 합전(関ヶ原の合戦) 이후로는 거의 폐길이 되었습니다.

세키가하라( 関ヶ原)
케이쵸(慶長) 3년8월18일 (1598.9.18.), 히데요시(秀吉)가 죽자, 다음 천하인(天下人)으로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대두하게 됩니다.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와 친했던 카게카쓰(景勝)은, 이에야스(家康)와의 대립을 결의, 도쿠가와(德川)家와의 융화를 주장한 우에스기(上杉)가 중신 · 후지타 노부요시(藤田信吉)를 추방하고, 이에야스(家康)의 거듭되는 상락(上洛 - 경으로 올라가는 것)의 요구도 거절, 이윽고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의 원인이 되는 아이즈(会津)정벌을 일으킵니다.

결과적으로, 우에스기 군의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의 영지인 야마가타(山形) 공략에 실패합니다.

또한, 반격에 나온 우에스기군에게 쇼나이(庄内)지방을 탈회(奪回)당하고, 또한 모가미군의 원군으로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가 보낸 다테군(伊達軍)과도 격돌, 결과적으로 다테군의 후쿠시마(福島) 침공을 유발하게 됩니다.

카게카쓰(景勝) - 카네쓰구(兼続) 주종은 배후를 위협하는 모가미 - 다테를 굴복시키고, 간토(関東)로 침공하는 구상을 품고있었으나 세키가하라 전장(関ヶ原本戦)이 하루에 결착나는 등, 그 구상은 실현되지 않은 채 항복하게 됩니다.


에도시대(江戸時代)

케이쵸(慶長) 6년(1601) 7월, 카네쓰구(兼続)는 카게카쓰(景勝)와 함께 상락(上洛)하여 이에야스(家康)에게 사죄합니다.
이때 카게카쓰는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 30만섬을 경감 이봉(移封-영주를 다른 영지로 옮기는 것 )되어, 우에스기(上杉)氏 존속을 허락받았습니다.
그 후는 도쿠가와(德川)家에게 충성을 맹세, 케이쵸(慶長) 13년1월4일 (1608.2.19)에 시게미쓰(重光)로 개명합니다.

이로 인해 우에스기 가(上杉家)는 심함 재정난에 빠졌지만, 카네쓰구는 「사람이야말로 조직의 재산이다. 모두 따라오고 싶은 자는 따라 와라 (人こそ組織の財産なり。みんな来たい者はついてこい)」라며, 사람을 버리는 등의 구조조정 등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요네자와(米澤)는 이전의 영토의 1/4 의 곡식이 수확되는 땅으로, 우에스기 가(上杉家)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혹독한 생활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가신과 가족 3만명을 부양하기 위해, 카네쓰구(兼続)는 스스로부터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토지의 개간을 진척시키기 위해 치수사업에 주력합니다. 
요네자와 성(米沢城) 아래를 흐르는 모가미 강(最上川) 상류에는 3km에 걸쳐 돌이 적재,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마련되어진 이 둑은 「나오에 방죽 (直江石堤 : なおえせきてい)」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도시를 정비하고, 생산을 번성시키고 산업을 일으키고(殖産興業) · 광산 개발을 추진하는 등 요네자와 번(米沢藩)의 행정 기초를 쌓습니다.

요네자와시(米澤市)의 교외에는 그의 지시에 따라 토지를 개척한 무사의 후손이 지금도 생활하고 있으며, 집 주변에는 밤나무, 감나무, 울타리에는 오갈피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이런 식용이 가능한 실용적인 나무를 심도록 한 카네쓰구의 혜안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카네쓰구는 비상시에 대비하여 요네자와(米澤)의 묘석을 격자형으로 하도록 명령합니다. 묘석의 격자에 봉(棒)을 통과시켜 늘어놓는 것으로 강고한 돌담(石塀)을 만든 것과 같은 효과를 내는 그의 아이디어라고 합니다.

우에스기(上杉)家와 도쿠가와(德川)家의 융화를 꾀하고,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와도 교류가 있어 케이쵸(慶長) 14년(1609)에는 마사노부(正信)의 조정으로 10만 섬 만큼의 임무가 면제되는 등 우에스기(上杉)家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또, 마사노부(正信)의 아들인 혼다 마사시게(本多政重)가 한때 카네쓰구(=시게미쓰)의 양자가 되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마사시게와는 양자결연이 해소되어도 친교가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케이쵸(慶長) 19년(1614) 오사카의 진(大坂の陣)에서도  도쿠가와(德川) 편으로 참전, 쪽으로서 참전하고, 시기노 전투(鴫野の戦い) 등으로 무공을 세웁니다.

겐나(元和) 5년12월19일 (1619.1.23), 에도(江戶) 우로코 저택(鱗屋敷)에서 병사합니다. 향년 60세입니다. 

요네자와시(米沢市)의 토쿠쇼사(徳昌寺)에 매장되어, 그 후, 도쿠쇼사(徳昌寺)과 린센사(林泉寺)의 다툼이 일어나, 패배한 도쿠쇼사(徳昌寺)이 대가 끊어졌기 때문에 코우겐사(東源寺)에 다시 장사되어집니다.
후에 번청(藩庁) 의 결정(裁定)에 따라 린센사(林泉寺)에 다시 장사되어집니다.

쇼와(昭和)13년 4월30일(1938), 요네자와시(米沢市) 마루노우치(丸の内)의  마츠가사키 신사(松岬神社)에  미사키(岬) 신사(神社)에 배사(配祀 - 같은 신사 안에 주신(主神)에 곁들여 다른 신을 모시는 것)되어,  그때부터 제2차세계대전 종전까지 요네자와시(米澤市)의 축제(祭)로서 나오에 마츠리(直江祭)를 매년 4월30일에 집행하였다고 합니다.

카네쓰구(兼続) 사후에는, 그의 아들의 요절 이나, 혼다 마사시게(本多政重) 와의 양자결연의 해소(解消)등이 원인으로, 나오에 가(直江家)는 으로 나오에(直江)가는 대가 끊어지기 되었다고 하지만,  「우에스기 가(上杉家)의 감소이봉(減移封)을 초래한 것에 책임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 「급료가 높았던 나오에가(直江家)의 지행(知行 - 영지로서의 토지를 지배함)을 반납하는 것으로 조금이라도 우에스기 가(上杉家)의 재정을 돕기 위해서」라는  의도적으로 카네쓰구(兼続)가 집안의 대를 끊었다고 하는 설(說)도 있습니다.

카네쓰구(兼続)가 죽었을 때 우에스기 카게카쓰(上杉景勝)로 부터, 은 50장,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로부터 은 50장이 보내졌다고 합니다. 

또한, 아내 · 오센(お船)과의 부부사이는 무척 좋아서, 카네쓰구는 평생 측실(側室)을 한사람도 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카네쓰구(兼続) 타계로부터 18년후인 칸에이(寬永) 14년(1637)에 아내 · 오센(お船)이 타계. 카네쓰구와 센(船)이 행하고 있던 번의 행정 운영(藩政運営)은, 카네쓰구의 오른팔로 일하던 히라바야시 마사오키(平林正興)가 이어받았습니다.


「愛」글자를 앞에 붙인 투구(兜)가 카네쓰구가 사용하였던 것이라고 요네자와시(米澤市)의 우에스기 신사(上杉神社) 케이쇼전(稽照殿 - 우에스기 신사의 보물전)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 「愛」에 대해서는, 속설로서 「인애(仁愛)」나 「애민(愛民)」의 정신에서 유래했다고 일컬어지지만, 우에스기 켄신이 비사문천 신앙을 나타낸 「毘」의 글자를 깃발에 사용하는 등, 당시, 신명(神名)이나 불상(仏像)을 투구나 깃발 등에 썼던 것이 일반적이였던지라, 군신(軍神)인 「애염명왕(愛染明王)」 또는 「아타고권현(愛宕権現)」을 상징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자료출처 : http://ja.wikipedia.org/wiki/%E7%9B%B4%E6%B1%9F%E5%85%BC%E7%B6%9A

http://ishigakiotoko.web.fc2.com/douzou/naoe-kanetsugu/naoe-kanetsugu.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