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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시이라 2011. 4. 11. 17:35

사나다 마사유키
(真田 昌幸 : さなだ まさゆき)

텐분(天文)16년 ~ 케이쵸(慶長)16년 6월 4일 (1547~1611.7.13)

 



이름변화 : 아명(幼名) 겐고로(源五郎) -> 무토 키헤에(武藤喜兵衛) ->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
계명/법명(戒名) : 쵸코쿠지도노(長谷寺殿) -> 옹천설대거사(翁千雪大居士)
묘소 : 사나다산(真田山) 쵸코쿠사(長国寺) - 나가노현 나가노시(長野県長野市)
         사나다산(真田山) 쵸코쿠사(長谷寺) - 나가노현 우에다시(長野県上田市)
         젠묘쇼원(善名称院) - 와카야마현 쿠도야마쵸(和歌山県九度山町)
관위(官位) : 종5위하(従五位下), 아와노카미(安房守)
주군(主君) :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 다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 →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 호죠 우지나오(北条氏直) →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 →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
씨족(氏族) : 사나다(真田)氏(자칭 시게노씨 : 滋野氏(しげのうじ)) → 겐죠우오토우씨(源姓武藤氏)
                  → 사나다씨(真田氏)
부친 : 사나다 유키타카(真田幸隆)
모친 : 카와하라 타카마사(河原隆正)의 여동생 ・ 쿄운원(恭雲院 : きょううんいん) -> (阿続方라고하는 설도 있음)
형제 : 사나다 노부츠나(真田信綱), 사나다 마사테루(真田昌輝),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
         사나다 노부타다(真田信尹),  카나이 타카카츠(金井高勝)
부인 : 정실(正室) - 야마노테도노(山手殿) / 칸쇼인도노(寒松院殿)
자식 : 4남 7녀
아들 : 사나다 노부유키(真田信幸 - 후에는 노부유키(信之)),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 /幸村), 
         사나다 노부카츠(真田信勝), 
         사나다 마사치카(真田昌親)
딸(娘) : 무라마츠도노(村松殿) - 오야마다 시게마사(小山田 茂誠)의 부인, 
            사나다 유키마사(真田幸政)의 부인, 
            칸바라 시게하루(鎌原重春)의 부인, 
            호시나 마사미츠(保科正光)의 부인, 
            오키쿠(於菊) - 우다 요리츠구(宇多頼次)의 부인,
                                 차후에 타키가와 카즈아츠(滝川一積)의 부인이 됨, 
            무키 요리테루(妻木頼照)의 부인, 
            오가쿠(於楽)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는, 전국시대(戦国時代)부터 에도시대전기(江戸時代前期)에 활약하던 무장(武将)이자 다이묘(大名) 입니다.

 

사나다 (真田)가문의 문장이기도 하며, 깃발의 문양인 6개의 동전(六文銭 : ろくもんせん)은 장례시 관에 넣는 6개의 동전(冥銭 : めいせん) 나타낸다고 합니다. 이는 「불석신명(不惜身命 : ふしゃくしんみょう」 (불법(仏法)읠 위해 신명(身命)을 바치는 것을 아끼지 않는다) 의 의미라고 합니다.

시나노 센보슈(信濃先方衆)로써 카이(甲斐)의 다케다(武田)氏의 가신(家臣), 시나노국(信濃国) 지역영주(地域領主)였던 사나다(真田)氏 출신입니다.
하루노부(晴信) 시대에 다케다(武田)家에 종사하였으며, 그후 다케다(武田)氏가 멸망한 후, 자립하여 호조(北条)氏나 도쿠가와(徳川)氏 등을 거처를 거쳐서 도요토미(豊臣) 정권 밑에서 근세다이묘(近世大名)가 되었습니다.

우에다 전투(上田合戦)에서 2번에 걸쳐 도쿠가와(徳川) 군사를 격퇴시긴 것이 알려져, 후세에서는 전국시대(戦国時代)를 대표하는 지장(知将), 모장(謀将)이라는 인물상으로 소설등에 나오기도 합니다.

텐분(天文)16년 (1547), 사나다 유키타카(真田幸隆)의 3남으로 태어난 마사유키(昌幸)는 텐분 22년(1553), 7살의 나이로 다케다 집안에 인질로 보내지고, 그는 다케다 하루노부(武田晴信)-> 후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시동(奥近習衆)이 됩니다.
신겐(信玄)은 그에게서 마사유키(昌幸)의 부친인 사나다 유키타카(真田幸隆)에게도 뒤지지않는 재능을 일찍부터 간파하여, 「나의 눈(我が眼)」이라고 부르며 총애했다고 합니다.

마사유키(昌幸)는 에이로쿠 시대(永禄年間 : 1558~1569)에 신겐의 모계(母系) ・ 오오이씨(大井氏)의 분가(支族)인 무토(武藤)家의 양자가 되어, 「무토 키헤에(武藤喜兵衛)」라고 이름이 바꾸게 됩니다.

에이로쿠(永禄) 7년(1564) 무렵에 토오토우미국(遠江国)의 토착영주였던 비토우 요리타다(尾藤頼忠)[훗날 우다 요리타다(宇多頼忠)]의 딸 야마노테도노(山之手殿)를 부인으로 맞이합니다.

『코요군감(甲陽軍鑑)』에 따르면 그의, 첫 참전 전투(初陣)는 에이로쿠 4년(1561)의 제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第四次川中島の戦い- 다케다 신겐 VS 우에스기 겐신)이라고 하며, 도보병 대장(足軽大将)으로 다케다家 사무직((奉行人)이기도 했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고 하는 설도 있습니다.

그외에 에이로쿠 12년(1569), 후(後) 호죠氏와의 미마세고개전투(三増峠の戦い)에 참가, 겐키 3년(1572) 신겐(信玄)의 상락작전(上洛作戦 - 군대를 이끌고 교토로 가는 것)에 참가,  그해 12월에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에도 참가했다고 합니다.

겐키 3년 (1573) 신겐이 병사하자, 다케다 가문은 다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가 잇게 됩니다.
이듬해인 텐쇼(天正) 2년 (1574)에 사나다 마사유키의 부친 유키타카(幸隆)가 사망하고, 사나다 집안의 가독은 적자(嫡男)인 노부츠나(信綱)가 이었지만, 텐쇼3년(1575)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노부츠나와 차남 마사테루(昌輝)가 모두 전사함으로써, 마사유키는 성씨를 다시 사나다(真田)로 바꾸어 사나다(真田)氏의 가독을 잇게 됩니다.

다케다(武田)家의 세력이 미카와(三河), 토토우미(遠江)에서 크게 후퇴하게 되고, 마사유키(昌幸)의 장인인 우다 요리타다(尾藤頼忠)는 본인의 형이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의 가신이 된 것을 기회로 오우미(近江)에 가서 히데요시의 동생인 하시바 히데나가(羽柴秀長)의 가신이 됩니다.

텐쇼(天正)6년(1578), 에치고(越後国)의 우에스키 켄신(上杉謙信)이 죽고 카이-에치고 동맹(甲越同盟)이 이루어지자, 마사유키(昌幸)는 호죠(北条)氏의 영지였던 히가시우에노 지역(東上野国)의 누마다 영토(沼田領)로 침공하여, 누마다성(沼田城)과 나구루미성(名胡桃城) 등을 빼앗습니다. 그리고 텐쇼7년(1580)에 종5위하(従五位下) ・ 아와노카미(安房守)라는 관직을 맡습니다.

텐쇼(天正)9년(1581), 다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의 명령으로 마사유키(昌幸)는 새로 축성하기 시작한 신푸성(新府城)의 공사감독을 맡습니다.

 

신푸성(新府城)
사진출처 : http://www.asahi-net.or.jp/~ju8t-hnm/Shiro/TokaiKoshin/Yamanashi/Shinpu/index.htm


텐쇼(天正)10년(1582) 3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다케다(武田) 정벌(征伐)이 시작됩니다. 이미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로 쇠퇴, 단결력도 붕괴되어 있던 다케다군(武田軍)에게는 조직적인 저항력이 없어 오다군(織田軍)에게 차례차례 영토를 침식당해 갑니다.

이 시기 마사유키(昌幸)는 다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에게 가이(甲斐)를 버리고 우에노(上野) 아가츠카(吾妻)로 도망갈 것을 진언하고 이와비츠성(岩櫃城)에서 카츠요리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카츠요리(勝頼)는 오야마다 노부시게(小山田信茂)의 성(居城) ・ 군나이 이와도노성(郡内岩殿城)을 향해서 후퇴, 그 결과 도중에서 노부시게(信茂)의 배신으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사유키(昌幸)의 다케다가문(武田家)으로의 충성을 나타내는 이야기도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다케다(武田)가 망하기 전부터 호죠 우지나오(北条氏直)와 접촉하였다고 하는 자료도 있습니다.

다케다(武田)氏가 멸망한 후 마사유키(昌幸)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가신(家臣)이 되어서 자신의 영지의 안전을 보장받고, 오다 가문(織田家)의 중신(重臣) ・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의 조력장수(与力武将)가 됩니다.

마사유키(昌幸)가 오다(織田)氏의 밑으로 들어가고 나서, 불과 3개월 후 텐쇼(天正) 10년 (1582) 6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횡사(横死)하자, 옛 다케다 영토의 오다 세력은 쇠퇴하여 가이(甲斐) ・ 시나노(信濃) ・ 우에노(上野)의 공백지대를 둘러싸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 호죠 우지나오(北条氏直) ・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 등이 싸우는 텐쇼진고의 난(天正壬午の乱)이 벌어집니다.

오다세력 중 하나인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의 부하, 마사유키(昌幸)는 칸나가와 전투(神流川の戦い)에서 패하자 호죠 우지나오(北条氏直)에게 돌아서,  호죠 집안(北条家)의 시나노 침공(信濃侵攻)의 선두에 섭니다.

조력하던 요다(依田)氏도 호죠(北条)와 한패가 되어, 시나노의 호죠지배는 실현될 듯한 움직임이 일었습니다.

그러나, 일변하여  마사유키(昌幸)는 이에야스(家康)의 회유(懐柔)를 받아들이고 호죠(北条)를 배신합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아카미고(若神子)에서 도쿠가와(徳川)와 싸우고 있던 호죠(北条)는 화친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호죠(北条)와의 대동단결(大同団結)을 선택한 이에야스(家康)는 호죠 우지나오(北条氏直)에게 화친의 조건으로 우에노(上野国)의 누마다 지역(沼田領)을 양도한다는 조건을 내겁니다. 이에 마사유키(昌幸)는 자력으로 획득한 누마다를 양보하는 것에 비하여 대체할 땅이 불확실했던 것에 반발하여, 도쿠가와(徳川) ・ 호죠(北条)와 적대관계에 있던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의 가신이 됩니다.

이로써 마사유키(昌幸)는 도쿠가와(徳川) ・ 호죠(北条)연합과 대립하는 우에스기(上杉) ・ 하시바(羽柴) 연합에 참가한 것입니다.

덴쇼(天正)11년(1583), 마사유키(昌幸)는 치쿠마강(千曲川) 영역을 막을 성(城)의 필요성에 의해, 강 북쪽과, 늪(沼), 벼랑(崖) 등의 자연을 요해(要害)로 삼는 지역에 마츠오성(松尾城 - 후의 우에다성(上田城))과 그 주위에 당시 번성하던 성 아래의 시가지(城下町)를 건설합니다.

 


 

우에다성(上田城)
사진출처 : http://www.chouk.or.jp/sanada/masayuki1.htm
http://www.asahi-net.or.jp/~ju8t-hnm/Shiro/TokaiKoshin/Nagano/Ueda/index.htm


덴쇼(天正)13年(1585年), 사나다(真田)氏을 노린 이에야스(家康)와 호죠 우지나오(北条氏直)는 토리이 모토타다(鳥居元忠),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忠世), 히라이와 치카요시(平岩親吉) 등 약 7,000의 병력으로 마사유키(昌幸)의 거성(居城) ・우에다성(上田城)으로, 호죠 우지쿠니(北条氏邦)를 누마다성(沼田城)으로 양쪽으로 침공시킵니다. 이것이 우에다 합전(上田合戦)입니다.

마사유키(昌幸)는 불과 2,000의 병력으로 도쿠가와 군대(徳川軍)에게 1,300명이나 되는 사상자를 내었다고 하는 대승(大勝)을 거둡니다.

이 제 1차 우에다합전(上田合戦)을 계기로 사나다(真田)氏는, 다케다(武田)의 옛 신하들로부터 시나노(信濃)의 독립세력(다이묘)으로써 도요토미 계 다이묘(大名)들 사이에 인지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러한 전쟁은 계속 (적어도 2번 이상) 반복되었다고 합니다.

그 해에는 카게카츠(景勝)의 인질이였던 차남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 /幸村)가 카게카츠(景勝)의 인질에서, 맹주(盟主)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인질로 오사카(大坂)로 출사하고, 마사유키(昌幸)는 도요토미 집안(豊臣家)의 신하가 됩니다.

덴쇼(天正)14년(1586)에는 사쿠(佐久)를 침공하여, 후 호죠(後北条)氏의 누마다성(沼田城)공격을 초래하였고, 이에야스(家康)와의 대립도 계속 이어졌지만, 그 해에는 히데요시(秀吉)가 전쟁을 금지시켰으며 마사유키(昌幸)를 비롯한 시나노(信濃)의 여러 다이묘(大名)를 이에야스(家康)의 휘하로 배속시켰습니다.

이 당시의 문서에 의하면 히데요시(秀吉)는 마사유키(昌幸)의 지혜를 높이 사서 「겉과 속이 다른자(表裏比興の者)」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는 지방의 작은 세력에 불과한 마사유키(昌幸)가, 주위의 거대 세력을 넘나들면서 세력을 확대해나간 수완(또는 지략)과 상황에 따라 거대 세력과 충돌도 마다하지 않는 용감함을 합쳐서 평가한 것이라 합니다.

덴쇼(天正)15년(1587)에 마사유키(昌幸)는 슨푸(駿府)에서 이에야스(家康)와 회견하고, 오사카(大坂)에서 히데요시(秀吉)를 알현하여 명실상부한 도요토미 가신(豊臣家臣)이 됩니다.
덴쇼(天正)17년 (1589)에는 히데요시(秀吉)에 의해 누마다 지역(沼田領) 문제를 중재하여, 토네가와강(利根川)을 기준으로 동쪽지역을 후(後) 호죠(北条)氏에게 양도하기로 하고, 마사유키(昌幸)는 대신 이나군(伊那郡) 미노와 지역(箕輪領)을 얻게 됩니다.
이 무렵 마사유키(昌幸)는 교토(京) 머무르고 있었지만 11월에는 후(後) 호죠(北条)氏의 가신인 이노마타 쿠니노리(猪俣邦憲)가  나구루미성(名胡桃城)을 공격하는데, 이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 秀吉)의 총무사령(惣無事令 : そうぶじれい), 즉  다이묘들 사이의 사사로운 전쟁을 금지한다는 법령의 위반으로, 이듬해 덴쇼(天正)18년(1590)의 오다와라(小田原)정벌의 원인이 됩니다.

분로쿠(文禄) 원년(元年)(1592), 히데요시(秀吉)가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 마사유키(昌幸)는 히젠(肥前)의 나고야성(名護屋城)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히데요시(秀吉)가 죽은 후, 도요토미 정권에는 오대로(五大老)의 필두(筆頭)인 이에야스(家康)가 대두하여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었습니다.

케이쵸(慶長)5년 (1600) 7월, 이에야스(家康)는, 소환명령에 거부한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를 토벌하기 위해 칸토우(関東)로 진격, 당시 교토에 주재하고 있던 마사유키(昌幸)도 이에 따릅니다.
이에야스(家康)가 자리를 비운 틈에, 고부교(五奉行-도요토미 정권 말기에 주요 정권의 실무를 맡아 행하던 5명) 중 한사람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가 거병(挙兵)하여, 여러 다이묘(大名)에게 이에야스(家康) 탄핵(弾劾)의 서한을 보내서 다수파 공작(工作)을 시작합니다. 마사유키(昌幸)는 시모츠케(下野国) 이누부시(犬伏)에서 서한을 받고, 처가인 우다(宇田)氏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와 인척관계였던 점을 활용하여, 차남 노부시게와(信繁(幸村))와 함께 미츠나리 측인 서군(西軍)에 가담, 싸울 준비를 위해 우에다성(上田城)으로 돌아갑니다.
이 때 마사유키(昌幸)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에게 「어째서 좀더 빨리 알려주지 않았는가(なぜ前もって知らせてくれなかったのか)」하고 썼다는 편지가 남아있습니다. 

동군(東軍)의 선봉(先鋒) ・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의 약 3만 8천여명의 대군(大軍)은 에도(江戸)를 출발하여 나카센도(中仙道)로 진입하였고, 9월 6일 (1600.10.12)에는 우에다성(上田城) 공략을 개시합니다.
마사유키(昌幸)는 불과 2,000명의 병력으로 농성하여 맞서 싸우는데, 이것이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의 전초전인 제 2차 우에다합전(第二次上田合戦)입니다.

이 무렵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는 서군(西軍)에 붙은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가 농성하던 우에다성(上田城)에 전진하려고 했을 때에, 히데타다(徳川秀忠)는 선진(先陣)인 이시카와 야스나가(石川玄蕃), 히네노 토쿠타로(日根野徳太郎=히네노 요시아키)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 시마다 효지로(島田兵四郎)라고 하는 자를 전령으로 내보냈습니다.
그런데 지리(地理)를 잘 몰랐던 효지로는 우에다성을 피해 돌아서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여, 무려 우에다성 오테문(大手門-일반적으로 성의 정문)에 당당하게 말을 달려, 보초병을 향해서
 「나는 에도 중납언(즉,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부하 시마다 효지로 입니다. 군명을 띄고, 우리 선진(先陣)이 있는 언덕까지 연락을 전하러 가는 중입니다. 시간을 다투기에, 부디 성내를 통과시켜주게 (私は江戸中納言(=徳川秀忠)の家来の島田兵四郎という者。君命を帯びて, 我が先陣の冠が岳まで連絡にいくところです。急ぎますので, どうか城内を通してくだされ)」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아군에게 연락을 하기 위하여, 현재 교전 중인 적군의 성을 통과시켜 달라고 하는 것이였기에, 너무나도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습니다. 보초병은 너무나 어이없는 일에 놀라 이를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에게 보고 하자,  「무척 배짱있는 무사일 것이다. 통과시켜주지 않으면 우리쪽이 속이 좁은 놈이 된다. 문을 열어주어라(なんと肝っ玉の太い武士だろう。通してやらねばこちらの料簡の狭さになる。門を開けてやれ)」 하며 문을 열어 주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고맙네(かたじけない)」하고 말하고, 성내를 달려나가며 뒷문을 빠져나갈 때, 시마다 효지로는 약삭빠르게 「돌아올 때 한번 더 올테니, 또 통과시켜 주게 (帰りももう一度来ますので, また通してくだされ)」하고 말하였고, 그 말대로, 다시 시마다 효지가 돌아와서 성에 들렸을 때,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는 무척이나 감복(感服)하여, 효지로(兵四郎)를 만나,
 「그대는 성내늘 통과하였기에, 우리 성의 상황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가지 대비가 있어도, 그것은 진정한 성의 수비가 아니다. 진정한 수비란, 성의 대장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そなたは城内を通過したので, 我が城内の様子を見ただろう。しかし様々な備えはあれど, それは城の本当の守りではない。真の守りは, 城の大将の心の中にあるのだ。)」라고 하며, 스스로 직접 안내하여 성 안을 자세히 보여주고, 후문을 열어서 돌려 보냈다고 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한편,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도쿠가와 히데타다군(徳川秀忠軍)에게 미노(美濃)로 와서 진을 구축할 것을 재촉하였고, 이에 히데타다는 우에다성 공격을 포기합니다.
우에다합전(上田合戦)에서는 악천후(悪天候)의 영향도 있어서, 결과적으로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 군대는 9월 15일(10/21)인 본 전투(本戦)에 늦어버립니다.
그 후, 본 전투(本戦)에서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가 패전했다는 보고가 도착하고도, 바로 항복하지 않고, 마츠시로성(海津城) 성주 모리 타다마사(森忠政)의 가신인, 카츠라오성(葛尾城) 성주 대리인 이도 우에몬(井戸 宇右衛門) 수하의 병사가 지키고 있던 카츠라오성(葛尾城)에 대항해서, 우에다성(上田城)에서 9월 18일과 9월 23일 2차례에 걸쳐서,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 /幸村)를 출격 시켜서 야습과 새벽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서군(西軍)의 패배가 명확해져서, 그 달에 도쿠가와로부터의 항복 및 개성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서군(西軍)패하자, 전후(戦後) 처리로 전국적으로 서군에 속해있던 다이묘들에 대한 처분이 내려집니다.

서군에 속해있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와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 /幸村)는 우에다 영토 몰수와 사형이라는 처분이 내려왔지만, 동군에 속해있던 사나다 마사유키의 장남, 노부유키(真田信幸 - 후에는 노부유키(信之))의 구명탄원으로 겨우 목숨을 구하고, 우에다 영지는 노부유키가 계승하게 됩니다. 그리고 12월에는 키이(紀伊)의 고야산(高野山) 기슭의 쿠도산(九度山)에 칩거하도록 하는 처분이 내려졌습니다.

 

쿠도산(九度山)에서는 고향으로부터 원조를 받아가면서 사나다 암자(真田庵)에서 생활하였습니다. 이때 후세까지 유용한 물건으로 명성 높은 사나다 끈(真田紐)을 제작하여 판매하였다고 합니다.

[왼쪽사진] 젠묘쇼원(善名称院 : ぜんみょうしょういん)
별칭으로는 사다다 암자(真田庵 : さなだあん)
사진출처 : http://kaki-kudoyama.com/sights/spot5.html



만년(晩年)에는 사면을 바랬지만, 결국 케이쵸(慶長)16년(1611)에 마사유키(昌幸)는 병사합니다. 향년(享年)65세입니다.

마사유키(昌幸)의 묘소는 나가노시(長野市) 마츠시로쵸(松代町) 마츠시로(松代)에 있는 사나다산(真田山) 쵸코쿠사(長国寺)에 있습니다.

 


오른편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묘,
가운데 부친 사나다 유키타카(真田幸隆)묘, 왼쪽 모친 쿄운원(恭雲院) 묘
 (사진출처 : http://www.chouk.or.jp/sanada/masayuki1.htm)

내용출처 : http://ja.wikipedia.org/wiki/%E7%9C%9F%E7%94%B0%E6%98%8C%E5%B9%B8